제 744 호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서
올해 겨울은 날씨의 변동성이 유난히도 큰 것 같습니다. 이 원고를 작성하는 2월 7일 현재, 서울 종로구의 기온은 –9도입니다. 그리고 체감온도는 더욱 낮습니다. 어젯밤에는 소복이 큰 눈이 내려서, 인왕산 주변과 캠퍼스 곳곳이 눈꽃으로 가득합니다. 지난해 말 확인한 기상 예보에서는 올겨울이 평년보다 따뜻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예보와는 달리, 2월 들어 날씨의 변동이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명의 교정에서 이 글을 읽게 될 3월에는 새싹이 막 돋아날 것입니다. 조만간 알록달록한 꽃들도 교정을 가득 채우겠지요. 저는 상명인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과거에 예상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변화는 일기 예보와 마찬가지로, 현재 예측한 것이 실제는 다를 가능성이 큽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상명의 학생들이 인생에서 2월을 지나 이제 막 3월에 접어들었다는 점입니다. 곧 사회에서도 알록달록한 여러분만의 예쁜 꽃망울을 터뜨릴 것입니다. 물론 개개인이 앞으로 어떤 꽃으로, 어디에서 활짝 필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생활의 변동성이 커지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움츠러들기 쉽습니다. 올겨울, 급격한 날씨 변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변화도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현재의 불확실성 속에서 움츠러든다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재가 아무리 춥고 향후 며칠 동안 맹추위가 지속될지라도, 변덕스러운 겨울이 지나면 결국 봄이 오고 꽃망울이 피어납니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고, 적절한 습도와 영양을 흡수하며, 해충과 질병의 위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친 꽃망울은 결국 풍성한 결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상명인 여러분 중 일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매우 추운 시기이며, 앞으로 그 추위가 더욱 심해지고 주변 환경의 변화가 많아 불안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상명이라는 양질의 토양에서 충분한 햇빛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깨닫고 자신의 역량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쌓고, 앞으로 마주할 어려움과 난관을 꿋꿋이 극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향후 사회에서 값진 성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상명인 여러분의 앞날에 따뜻한 봄날과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유승동 교수(경제금융학부)
제 744 호 과거와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
지난해를 돌아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노벨상이 발표되는 10월만 되면 “과연 우리도 수상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그러한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한 나라가 된 우리는 영화·음악·드라마 등으로 대표되는 K컬처가 그저 서구문화의 모방이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적 역량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다시금 확인시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한국은 대륙과 섬의 중간에 자리한 반도 국가이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천 년의 역사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이 땅의 ‘서사’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정신력이다. 한강 작가가 빚어낸 ‘문학’은 이러한 역사의 상흔과 극복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언어와 인종이 다른 세계 여러 민족과 깊이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밑바탕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서사’, 즉 문학·드라마·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서사는 그 어느 한 장면도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날의 고난과 아픔을 마주함으로써 현재를 견디고 미래를 그려내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들어 보면,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단지 문학에만 국한되는 물음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를 돕고 있는가. 혹은 우리 대학의 과거는 현재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과거와 역사는 화석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디딤돌이자 미래를 위한 도약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과거를 우리가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재해석하느냐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과 학교 구성원 모두 각자 자신의 ‘과거’를 짊어지고 있다. 그걸 다른 말로 자신의 ‘역사’라고도 부른다. 역사가 현재를 돕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려면 끊임없는 성찰과 탐구, 그에 따른 변화가 뒤따라야만 한다. 대학은 바로 그 탐구의 장이 되어야 하고, 학생들은 대학이 제공하는 지식과 환경 위에서 자신의 과거와 대화하며 미래를 열어 갈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문명 시대에는 인간이 가진 고유한 경험과 서사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바로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과거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학은 학생들이 과거로부터 배운 통찰을 발판 삼아 미래를 창조할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 일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학문을 탐구하고,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봄, 새 학기를 시작하는 모두가 과거를 ‘짐’이 아닌 ‘자산’으로 삼아 한 걸음 더 미래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돕고 있는 과거의 힘이며, 우리가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다.
제 744 호 [영화로 세상보기] 당신은 하나다
▲ <서브스턴스> 포스터 (출처: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61579)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증오스럽고 혐오스럽다.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겉보기에 알 수 없는 것까지,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생생하게 느끼다 보면,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이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남들만큼 예쁘지 못해서, 남들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남들만큼 잘나지 못해서, 남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나라서, 그런 나라서 내가 싫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나 혼자 남아 더 이상 비교할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은 더 나은 모습의 ‘나’, 최선의 ‘나’가 아니기에. 영화 <서브스턴스>는 그렇다면 너 나은 버전의 내가 될 수 있다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유명한 여배우이다. 시간이 지나 50세가 된 엘리자베스는 퇴물 취급을 받으며 오랫동안 진행해 오던 TV 쇼에서 잘리는 동시에 더 이상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배우가 된다. 나이 들어 젊고 아름답지 않은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TV에 나올 수 없다.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더 나은 버전의 나’가 될 수 있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투약하기로 한다. 그리고 더 젊고 아름다운 수의 몸으로 깨어난다. 그렇게 엘리자베스와 수, 한 사람의 영혼으로 이상적인 두 사람의 일상이 시작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수가 명세를 얻기 위해 서브스턴스 사용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서, 엘리자베스는 급속한 노화를 겪으며 삶의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결국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가 같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싸움을 벌이다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속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하나이다. 더 젊고 아름다운 내가 되는 것. 그러나 영화를 보면 그것이 엘리자베스가 진정으로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욕망은 여성을 향한 외모지상주의, 즉 여성을 향해 던져지는 사회의 시선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욕망, 그리고 자신을 향한 혐오의 이유가 정말로 엘리자베스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선택한 폭력적이고 파멸적인 결말이 정말로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혐오와 선택의 기저에 사회의 시선이 투영되었고,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더 나은 내가 되길 바라는 욕망, 그런 내가 될 수 없어 나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자기혐오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본다면 그 끝에는 나, 정말로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마음, 진정으로 나를 위한 마음이 아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오히려 그러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마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연 기자
제 741 호 주권의식과 학생회 선거
주권의식과 학생회 선거 대학의 학생회는 학생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대학 구성원의 한 축으로서 학교와 학생들의 사이를 잇는 중요한 기구이다. 총학생회, 단과대학생회 등 학생회의 구성을 위한 선거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행사이다. 80년대 총학생회가 출범한 이후 학생회는 사회 민주화 학내민주화의 상징으로 정치적, 사회적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소위 운동권 학생을 중심으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후 운동권의 분열과 여러 상황으로 학생운동의 힘이 쇠락하면서 거대 담론이 사라진 90년대의 사회 분위기와 IMF 경제위기 이후 정치적 무관심이 가시화되면서 학생회에 대한 기대나 관심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학생회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인한 투표율 저하는 급기야 학생회 구성이 불가능할 상태에 이르게 된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한 학생활동의 중단은 학생회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가져왔다. 현재는 온라인 환경의 변화로 학생회라는 대의 민주제 대신 직접 민주제도 가능한 상황이 되어 학생회의 존재의의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희석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학생회의 존재의의에 대한 효용성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2025학년도 우리 대학 학생회를 이끌어 갈 학생회 선거가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서울캠퍼스는 총학생회는 입후보자를 내지 못했으나 다행히 5개의 단과대는 입후보자를 내었고 당선되었다. 천안캠퍼스는 총학생회와 5개의 단과대학 중 두 개의 단과대학에서 입후보자를 내었으나 전체 투표율 30% 미만으로 학생회 결성이 무산되었다. 이번 선거 결과로 내년도 학생 자치활동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학기에 보궐선거가 실시되어 새로운 집행부가 꾸려진다면 그나마 어려움이 덜하겠지만 온라인 투표로도 철저한 무관심을 표하고 있는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투표를 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앞날을 전망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동안 많은 대학이 학생회 입후보자의 부재와 학생회 구성의 의결정족수 미달로 기구구성이 무산된 후 학생회 활동을 비대위 체제로 대체해 왔다. 우리 대학 역시 이번 연도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학생회 선거의 결과 내년도의 학내에 산적한 다양한 활동은 그간 해온 것처럼 비대위 활동을 통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비대위는 그야말로 비상대책을 위한 임시기구로서 인력이나 영향력 등에서 의결권이 없어 학내외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또한 권한 없는 비대위가 소수의 폐쇄적인 운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학생들은 관례상 학생회가 없어도 축제나 행사는 비대위에서 개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리나 단대학생회 학교 측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라 축제의 개최를 단언할 수 없다. 또한 학사 행정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 개진이 어렵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선거의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많은 학생들은 총학생회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정작 투표에는 무관심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입후보자의 효능감 없는 공약이나 도덕성, 능력에 대한 불만을 투표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대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철저한 정치적인 무관심과 혐오,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를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할 때 우중은 잘못된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는 그동안 세계 각국의 사례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에는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 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학내구성원으로서의 주권 의식을 행사하지 않을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바라기는 어렵다. 학생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비판은 내 권리를 보장하는 방법이고 선거는 그 시작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깨어있는 의식, 감사하는 시각,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할 때다.
제 741 호 [교수칼럼] 회독(回讀)
글을 의뢰받고 참고하라 안내해 주신 웹주소를 따라 이전 글들을 읽어보았다. 좋은 글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독자가 아니라 작자로서 글을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니 가볍게 보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누가 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 써야 할지를 가늠하게 되었다. 불현듯 ‘회독’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친다. 회독(回讀) 여러 사람이 차례로 돌려 가며 읽음. 회독(會讀) 여러 사람이 모여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연구하고 토론함. 어쩌다 보니 주위에 ‘회독’이라는 말이 익숙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멀게는 공직에 뜻을 뒀던 옛 친구들이, 가깝게는 교직에 뜻을 둔 학생들까지 ‘수험생’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사전의 뜻풀이와는 달리, 한 사람이 거듭해서(回) 읽는(讀) 의미로도 ‘회독’이 쓰인다. 교과서 10회독 공부법, 통권 10회독 공부법, 막판 공부법 : 회독법과 정리, ... 아닌가 다시 확인해 보니 연관 검색어로 ‘공부’가 눈에 띈다. 사실 거듭해서 읽는 행위는 그리 낯선 행동은 아니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시험, 발표라는 행위들은 ‘회독’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과에 만족하고자 한다면 시험 범위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발표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하기 위해 거듭거듭 다시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험, 발표란 제한된 기간 내에 일정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회독’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행위라고 평가할 만할 것이다. 만족할 만한 결과라 평가하려면 ‘자기 만족감’, ‘사회적 인정’ 등의 조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회독’이라는 표현으로는 낯설지 몰라도 거듭해서 무언가를 하는 행위는 그리 낯설지 않다. 러닝, 클라이밍 등에서 코스를 완주하고 완등하는 것은 동호인들이 거듭해서 시도하여 얻은 만족할 만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면 동호인들은 성과를 얻기 위해 몇 ‘회독’이나 할까. ‘동호인’과 ‘회독’이라니, 이 어색한 조합. ‘동호회’라는 단어가 주는 ‘자발성’이 ‘회독’의 의무감과 이질적이어서일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든다. 혹 달디단 밤양갱이 있으니 ‘회독’의 의무감을 이겨내 보자는 이야기로 흘러간다는 의심을 사는 건 아닌가 괜한 걱정도 해 본다. 회독이든 아니든, 의무감이 수반되든, 재미가 따르든 거듭한다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5km 완주자는 10km, 20km 완주를 도전하고, 15m 완등자는 30m, 40m 완등을 도전하는 모습은, 수험생이 5회독, 10회독을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기를 보내며 이런저런 ‘회독’으로 지쳐 있는 나에게, ‘쉼’이라는 ‘회독’이, 그리고 갱생을 도모할 ‘방학’이라는 ‘회독’이 머지않았음을 되새겨 보시길. 아니라고는 했지만 결국 어디선가 들었음 직한 이야기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런 이야기로 주의를 환기하는 것 또한 아닐까. 글을 맺으려다 문득, 이 글의 난삽함에 편집자는 회독을 강제당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기만 하다. 국어교육과 오민석 교수
제 741 호 [책으로세상보기] 죽은 언어로 보는 이 세상은
제 740 호 조커 : 폴리 아 되
조커 : 폴리 아 되 ▲ 폴리 아 되 포스터 (사진: 곽민진 기자) 조커 : 폴리 아 되, 2019년에 개봉한 《조커》의 후속작으로 조커 시리즈 전작이 꽤나 흥행한 터라 해당 작에 대한 많은 관심이 모였다. DC코믹스의 메인 악당이자, 유일무이한, 예측할 수 없는 혼돈, 악 그 자체로 형상화되어 거대한 존재감과 팬덤을 가진 조커의 단독 시리즈 등장이기에 특히 기대에 부풀어 관람하게 되었다. 부제, 폴리 아 되(Folie deux)는 프랑스어로 '둘의(à deux) 광기(folie)'를 뜻하며, 정신의학 용어로 '공유정신병적 장애'를 의미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같은 정신장애를 앓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영화에서 조커와 할리퀸의 관계를 형상화하는 동시에, 조커와 그를 추종하는 세계와의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루니 툰 워너브라더스 로고와 인트로 송과 함께 나오는 애니메이션으로 영화가 시작하는 도입부가 특히 인상 깊었다. 아서와 아서의 그림자가 서로 진짜 조커가 되어 쇼에 나가기 위해 싸우는 내용으로, 아서는 중간에 그림자에게 조커를 빼앗기고 다시 조커가 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만 그림자는 조커가 되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 무대에 오르고, 경찰이 찾아오자, 쇼를 실컷 즐긴 그림자는 조커를 다시 아서에게 되돌려준 뒤 도망친다. 아서는 그토록 원하던 조커를 되찾았지만, 그림자가 조커가 되어 한 짓까지 전부 뒤집어쓰는 바람에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그 와중에도 "똑똑" 농담을 치는 그를 확대하며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구타해 피가 범벅되면서 화면이 붉게 칠해지다가 커튼으로 거두어지면서 본 영화가 시작된다. 해당 도입부는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듯해 영화 시작 후, 영화가 끝난 뒤 모두 다시 해석해 볼 여지가 남아있다. 해당 영화의 연출들 곳곳이 제법 미감을 잘 살려냈는데, 뮤지컬 형식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요소를 도입한 점도 흥미로웠다. 등장인물들의 광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선 효과적인 장치일 수 있지만, 후반부에는 오히려 집중이 어렵게 하는 듯해서 개인적으로는 불호였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조커, 소시민 사이에 혼란스러워하는 아서의 비참한 최후와 비정하고 혼란 속에서 광기만을 추앙하는 사회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허무하게 비정한 사회에 두들겨 맞고 몰락한 아서라는 볼품 없는 남자가 ‘조커’라고 형상화되기에는 기존 팬들의 기대와는 상충적이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관객이 기대한 것 역시 완전무결한 악, 혼돈 그 자체로, 우리 역시 영화 속 흥분한 군중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은 듯해 입맛이 씁쓸하기도 했다. 사회의 혼란과 경멸, 외면이 만들어낸 거대한 악, 혼돈 그 자체의 형상화였던 조커라는 캐릭터를 또 다른 관점에서 관객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줘 흥미로운 영화였다. 곽민진 기자
제 740 호 상대적인 시간의 기억
상대적인 시간의 기억 많은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하고, 공부를 하거나 수업을 듣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상이거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거나 여행을 다닌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시계 속의 시침과 분침이 알려주고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아닌 상대적인 시간을 보낸다. 어린 아이들은 잠시만 가만히 있어도 심심하고 지루함을 느낀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은 지루함을 견디다 부모의 10분이 10시간으로 느껴져 칭얼대다가 혼이 난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감각이 느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화 현상의 일종이다. 노화로 인한 세대별 감각의 차이는 아이와 대학생에게서도 발생한다. 느려진 감각(오감)은 순간의 기억을 희미하게 만든다. 마치 분당 60프레임으로 영화를 찍다가 20프레임으로 영화를 찍는 것과 같다. 더욱이 이러한 프레임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도 기억력의 퇴화로 점점 줄어들게 된다. 절대적인 시간 속에 개개인은 각각 상대적인 시간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신경세포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은 기억, 행복, 의욕 등에 관여한다. 행복과 의욕의 감정으로 분비된 도파민은 당시의 기억을 오래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과도한 도파민은 기억력과 집중력을 감소시킨다. 일상적으로 항상 해오는 일이나 습관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특별하게 계획한 여행, 합격 소식, 기대하지 못했던 즐거운 경험, 어려운 일과 공부를 밤새 해낸 경험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행복과 의욕에 관련된 기억들이 생생하게 오랜 남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원치 않은 기억이지만 슬픈 경험과 불행한 경험도 오래 남는다. 어렸을 때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죤스를 보았던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에 본 적이 없는 멋지고 다양한 특수효과들이 그 영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비슷한 영화를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를 보면서 도파민이 많이 나왔다가, 그 이후의 비슷한 영화에서는 무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PC나 핸드폰 게임, 그리고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을 많은 사람이 경험한다. 이는 순간의 과도한 도파민이 현재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기억 속에 남지 않고, 이미 있는 기억조차 지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과도한 도파민은 더욱 많은 양의 도파민이 있어야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행복과 즐거움으로 느꼈던 기억이 과도한 도파민으로 인해 둔감해지고 사라질 수 있다. 짧은 쾌락을 위한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경우 결국 기억의 프레임 하나하나가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유명 일타강사는 “최선을 다해 어떤 것을 열심히 하면 DNA가 기억한다“는 얘기를 했다. 공부든 일이든 항상 열심히 한다면 당장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도 그러한 습관이 몸에 배어 후에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한 기억들은 몸의 DNA뿐만 아니라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어려워 포기하기 쉬운 공부나 일을 밤을 새우며 끝내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던 기억은 희미할 수 있지만, 떠올릴 때마다 기분 좋은 느낌이 생기며 의욕을 높일 수 있는 기억이 된다. 사람들은 기억을 저장해둘 프레임이 빛바래고 급속히 줄어들고 있음을 느끼면서, 남보다 더 긴 상대적인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며 다른 기억들을 만들고 있는 매 순간의 절대적인 시간 속에, 즐겁고, 뿌듯하며, 의욕적인 기억을 많이 저장한 긴 상대적인 시간이다. 어떠한 기억을 만들며 상대적인 시간을 늘릴 것인가?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같은 시간도 누군가에게는 길고, 누군가에게는 짧다. 대학에 와서 만들고 싶었던 좋은 기억 중 DNA에 흔적을 남길 정도로 열심히 무언가를 한 기억들, 여행이나 친구들과 어울렸던 즐겁고 행복한 기억 같은 상대적인 시간의 기억을 늘릴 때가 바로 지금이다. 고영건 교수 (화공신소재전공)
제 740 호 한강, "문제의식의 깊이와 미적형식의 아름다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단상 상명대 학보사의 한강 관련 원고청탁이, 한국 최초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초로 여성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문학사적 사건에 따른 것인지라 이와 관련된 여담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아울러 한강의 소설들을 십수 년 전부터 주목하던 오래된 애독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소년이 온다』에 대해서 미진한 능력이나마 공을 들인 논문 한 편도 발표한 적이 있는 연구자로서, 짧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쓴다는 핑계로 사적인 소회도 다소간 피력하고자 한다. 사실 한국의 문학 평론가나 문학 전공 교수들 혹은 출판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한강이 언젠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들이 오고 간 지는 꽤 되었다. 2007년에 출간된 『채식주의자』가 2015년 영어 번역본으로 출간되자마자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시점은, 사실 또 다른 맥락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2016년보다 2년 전인 2014년에, 한국 평단의 큰 주목을 받은 『소년이 온다』가 이미 한국어로 발간되었다. 평자들 각자의 관점과 감수성에 따라 갈릴 수는 있겠으나, 적지 않은 평자들이 『소년이 온다』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사건을 정면으로 끌어안은 한강 소설 세계의 또 다른 분기점이자 확장 지점이라고 평가하였다.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심사위원들 가운데 한 명인 안나 카린 팜은, 한강의 작품들 가운데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추천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별 망설임 없이 『소년이 온다』를 꼽기도 하였다. 2014년의 『소년이 온다』에 이어, 한강이 맨부커상 최종 수상자로 결정된 2016년 5월에,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소설 세계에 대한 ‘작가의 말’과도 같다고 한, 작품의 구성과 전개 방식으로 볼 때 한강의 가장 ‘시적인 소설’ 혹은 ‘시적 산문’에 해당하는,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정제된 작품 『흰』이 발간되었다. 따라서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이, 또 다른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 이미 출간된 한국어 작품들의 높은 수준 (주제 의식의 깊이와 치열함, 정련된 문체, 서사적 구성의 독창성과 밀도 등으로 판단할 수 있는)으로 미루어 볼 때 국제적인 파장의 시작점일 뿐이리라는 점을, 어느 정도 눈썰미가 있는 전문가나 독자들은 예상할 수 있었다. 2017년 『소년이 온다』가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채식주의자』는 맨부커상에 이어 2018년 스페인 산클레멘테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7년 『희랍어 시간』이 프랑스 메디치 외국 문학상 최종후보에, 2018년 『흰』이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다시 한번 올랐다. 2021년 출간되어 평단과 독자로부터 재차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별하지 않는다』는, 1948년 제주 4‧3사건에서 한국전쟁기 보도연맹 사건으로 이어지는 해방 직후의 극단적인 이념 대립과 내전 상황에서, 국가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양민학살 사건들을 세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소설화하였다. 『소년이 온다』 이후 7년 만에 출간된 『작별하지 않는다』는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시간대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를 통해 한강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 즉 인간과 사회의 폭력성과 치유 가능성, 나아가 폭력성의 극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더욱 선명하게 정치적이고 역사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 소설이 직시하는 역사적 기억의 일차적 주체는, 1948년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 되었다가, 한국전쟁의 개시와 함께 최대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도 연맹원 대량 학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남편의 진실을 필사적으로 추적하는 인선의 어머니이다, 동시에 어머니가 남긴 자료들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평생의 투쟁을 이어가는, 4‧3의 진실을 예술적 형식으로 각인시키고자 하는 딸 인선이 있다, 그리고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의 역사이자 한국 현대사의 참상에 한발 한발 온몸을 밀어 넣기 시작하는 인선의 친구 경하가 있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시간대를 가로지르는 역사적 기억을, 인선의 제주도 집에 남겨진 앵무새 아마의 생명을 살리려는 경하의 여정을 매개로, 풍요로운 시적 상상력과 은유 및 이에 연동된 특수한 서사적 리듬으로 소설화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2023년 프랑스 메디치 외국어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유럽을 기준으로 할 때 얼추 두 세기 반 이전에 본격화된 근대 소설의 전개 과정을 되짚어 보면, 역사에 남을 작품성과 세계적인 문학상의 수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가령 20세기 초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문제의식 혹은 문학적 혁신성을 보여 준 작가들로 평가되는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레프 톨스토이 등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몇몇 소설들이 각종 문학상의 최종후보로 올라가고 연이어 수상까지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한마디로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그나마 잘 알고 있는 프랑스 문학계의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2014년의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2022년의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를 예로 들면, 이들의 작품에 견주어 한강의 작품들이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농담 섞인 확신을 지인들과의 사석에서, 혹은 수업 시간에 우연히 학생들에게 피력한 적이 있다, ‘일단 한강한테 먼저 줘야 되는거 아냐? 끗발 있는 나라 작가들이라고 노벨문학상 너무 쉽게 받는 거 아냐?’라는 식으로… 농담이었지만 전적으로 농담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1901년 제1회 노벨문학상이 프랑스 작가 쉴리 프뤼돔(Sully Prudhomme)에게 부여된 이래, 한강을 포함하여 2024년까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총 121명의 작가 가운데 91명이 유럽 작가이다. 성별로 구분하면 지금까지 여성 수상자는 18명에 불과하다. 지금까지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가운데는 심지어 더 이상 문학사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는 작가들도 일부 있는데, 이들은 예외 없이 유럽 출신 남성 작가들이다. 그런데 한강이 언젠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이고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지만, 이렇게 빠르리라고는 당연히 예상할 수 없었다. 만 54세라는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의 편향성 시비 때문에라도 이번에는 아시아 출신 여성 작가의 수상이 점쳐지기도 하였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현재까지의 노벨문학상 운영 관행에 비추어 볼 때 모든 면에서 기분 좋은 예외적 사건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언론에서 많이 회자 된 노벨 위원회 위원장 안데르스 올슨의 발표문 가운데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치열한 시적 산문(for her intense poetic prose that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 한강의 작품 세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요약이라고 생각된다. 주제의 측면에서 한강 작품의 근본적인 특징은,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사건 등 한국사의 결정적인 비극적 사건의 소설화에 있어서, 이미 『채식주의자』가 그러하듯이 인간성 혹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소년이 온다』에서, 계엄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항쟁 마지막 날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가 체포되어 수감 된 교육대학 복학생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노벨상 위원장도 언급한,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한국의 많은 평론가들과 연구자들이 언급한 한강의 시적 산문과 이에 연동된 이탤릭체 표기는, 위와 같은 강렬한 근본적 질문이 정점을 향해 고양될 때, 단순한 문체상의 스타일이 아니라 감정과 감수성의 충만한 밀도로서 제시된다. 즉 한강 작품 세계의 또 다른 일면인 예술성에 대한 탐구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작가의 주제의식과 밀접하게 일체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문체의 정련된 감각적 밀도를 매개로, 한강의 소설은 인간과의, 인간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의 작별을 거부하는, 어떤 아슬아슬하고도 절실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간다. 상명대학교의 학생들이 한강의 한국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나아가 인간 자체와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그러나 크고도 깊은 연대 의식을 공유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의 여러 동료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한강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강의 작품들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의 깊이와 미적 형식의 아름다움이, 지금 세상에 너무도 보편적으로 절실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의진 교수 (프랑스어권지역학전공)
제 739 호 제 739호 [영화로 세상 보기] 사람만큼 변하는 것은 없다지만
사람만큼 변하는 것은 없다지만 영화 <룩백(2024)>을 보고 ▲ <룩백(2024)> 포스터 (사진: http://m.cine21.com/movie/photo/?movie_id=61664&img_id=448548)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람과의 관계 또한 수없이 변화한다. 어제의 친구가 어제의 적이 될 수도 있고, 어제의 적이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면, 아끼던 친구가 내일은 나와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된다면. 자꾸만 변하는 사람에게, 타인에게 마음과 인생의 일부를 건네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다사다난했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다짐했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타인을 믿지 말 것.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할 것. 다시는 타인에게 인생의 일부를 건네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한 내 생각을 영화 <룩백(2024)>은 따스하게 껴안아 뒤집어 놓았다. 영화 <룩백(2024)>은 주인공 후지노가 자신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쿄모토를 만나며 시작된다. 후지노는 쿄모토를 뛰어넘기 위해 2년 동안 피나는 연습을 하지만, 여전히 자신보다 잘 그리는 쿄모토를 보고 만화 그리기를 그만둔다. 시간이 지나 졸업식 날, 후지노는 담임 선생님의 부탁으로 졸업증서를 전해주러 쿄모토의 집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후지노의 오랜 팬이었다며 싸인을 부탁하는 쿄모토를 만나게 된다. 이후 친해진 둘은 함께 만화를 그리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 쿄모토가 만화를 그만두고 미대를 가게 되면서 둘은 다투고 후지노 혼자 만화를 그리게 된다. 그러던 중 괴한의 습격으로 쿄모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후지노는 또다시 만화 그리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쿄모토의 집을 방문해서 자신이 싸인을 해줬던 쿄모토의 옷을 보며 후지노는 어린 시절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자신을 떠올린다. "사실 만화 말인데... 나, 그리는 건 전혀 좋아하지 않아. 하나도 안 즐겁고, 귀찮기만 하고. 음침해 보이잖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려도 완성되질 않는다고. 만화는 그냥 읽기만 하는 게 나아. 직접 그릴 게 못돼." 그러자 쿄모토가 묻는다. "그럼,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그 말에 후지노는 그동안 함께 만화를 그리던 쿄모토 미소, 자신의 만화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그 미소를 떠올린다. 쿄모토는 다시 만화를 그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사람만큼 변하는 것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영화 <룩백(2024)>은 감히 말한다. 사람은 사람을 일으킨다고,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인생의 일부를 타인과 함께 공유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타인에게 내 인생의 일부를 건넸다면, 그 일부는 언젠가 후에 내가 무너졌을 때 구원이 되어 돌아온다. 후지노가 만화를 그만두고 무너졌을 때 쿄모토의 응원과 미소를 떠올리며 만화를 다시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김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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